보기 좋은 떡이 맛도 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게임도 마찬가지 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건 아니다.
지난해 말, 혜성같이 나타나, 잠자고 있던 게이머의 본능을 일깨운 국산 미소녀 게임 '라스트오리진'.
어느나라 게임인 줄도 몰랐고 '일본 작품인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섹시한 일러스트로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 큰 회사의 작품도 아니었지만 사전예약에만 70만이 몰릴 정도로 이례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월 24일 오픈된 라스트오리진은 예상치 못한 7만명의 유저들이 한꺼번에 몰리며 시스템에 부하가 걸렸다. 개발사 스마트조이는 무리하게 서비스를 지속하기 보단, (눈물을 삼키며) 고객들을 위한 긴 호흡을 택했다.
스마트조이에서 라스트오리진의 개발을 총괄하고 있는 복규동 본부장을 오픈베타 직전 만났다.
"2월 15일,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른다. 2월 17일까지 3일간 오픈베타를 시작한다. 기다려준 유저들이 눈물나게 고맙다"며 복규동 본부장은 첫 마디를 꺼냈다. "오픈베타 테스트를 통해 게임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게 확인되면, 2월말 경에는 정식 서비스할 예정"이라 덧붙였다.
지난 1월 오픈 이틀만에 서비스를 중단해야했던 그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사실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물건이 잘못됐는 데, 이걸 회수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고객에 대한 도리"라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날의 사태로 게임에 실망하고 떠난 유저들도 꽤 많았을 것 같다. 이에 대해 복 본부장은 "염치 없지만,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라스트오리진의 안정성이 확보되면 떠났던 유저들도 반드시 다시 복귀하리라 믿는다"며 은근한 자신감도 내비쳤다.
개발사 스마트조이는 설립 3년차의 비교적 신생 개발사이지만 개발 인력들은 업계에서 10년 이상 개발 노하우를 차곡차곡 쌓아온 베테랑들이라고 한다. 복 본부장도 탑픽의 '나나이모' 시나리오 담당으로 게임계에 입문해, KOG에서 '파이터스 클럽' 시나리오 라이터, 미리내게임즈에서 '그날이 오면 for Kakao'의 PM을 거친 인물이다.
첫 공개부터 유저들을 사로잡았던 메인 일러스트를 그려낸 아트디렉터는 복 본부장과 '파이터스 클럽' 개발 때 함께 손발을 맞췄던 강호(?)의 실력자라고 한다.
라스트오리진이 유저들의 큰 주목을 받은 이유가 단순히 파격적인 일러스트 때문만은 아닐 것 같았다. 복규동 본부장에게 물었다.
"함대 콜렉션같은 종류의 미소녀 게임은 꽤 있었지만, 포스트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소재는 라스트오리진이 최초일 것 같다. 그리고, 기획 초기부터 청소년 불가 등급을 각오하고 표현의 자유도 높였다. 거기에 요즘 성행하는 페이 투 윈(Pay to Win)의 BM을 과감이 떨쳤버렸다. 돈을 쓴다고 결과가 달라져서는 안된다는 게 개인적 소신"이다고 그는 답했다.
라스트오리진은 서브컬처 코드에서도 좀 더 깊이 파고든 블루오션 전략을 택한 셈이다.
이런 과감한 전략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2018년 1월, 개발을 본격 시작하기 전 수개월 전부터 꼼꼼하게 시장조사를 하고 1년 후 미래를 예측했다. 그 때, 회사 경영진에게 보고할 제안서만 30종 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개발의 규모, 성공 가능성 등을 밀도 있게 분석해 방향을 결정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라스트오리진이 청소년 불가 등급을 내세운, 단순히 시류만을 좇는 게임이 아니란 걸 그의 말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라스트오리진이 포커싱하고 있는 주된 유저층은 어디일까.
"사실 상, 오덕 팬을 위한 게임이 맞다. 그러나 구매력이 크게 높지 않은 30대 중반까지의 남성이 우리의 주 고객층이다. 그들이 한달동안 쓸 수 있는 비용의 한계를 감안한 게임이다. 돌이켜보면, 이 계층은 그간 업계에서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던 타겟"이라고 말한다.
최근 등장하는 모바일 MMORPG들이 30~40대 구매력 높은 아재층을 노리는 것과는 상반된 전략이다.
그는 "우리가 집중하는 유저층은 콘텐츠 소모 속도도 매우 빠른 편이다.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2개월마다 대규모 업데이트와 12개 스테이지로 이뤄진 챕터를 지속적으로 추가할 예정이다. 서약, 승급을 비롯해 캐릭터 이야기 등 다양한 시스템이 준비돼 있다. 미소녀 콜렉션을 채울 만한 캐릭터도 매주 1~2종씩 추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소비력은 높지 않은데, 소모력은 높은. 개발사에게 있어선 '강력한 상대'일 수밖에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고 멀리 가겠다는 스마트조이의 구상이 돋보인다.
이번 사태가 또 다른 기회도 불렀다.
화제의 중심에 섰던 덕에 해외 퍼블리셔들의 서비스와 투자 제안이 많이 들어오고 있단다. 복 본부장은 "유저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현재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국내 유저들에게 안정된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이다. 해외 서비스는 지금 당장 급하지 않다"고 못박았다.
복 본부장은 끝으로 "당초의 약속 지키지 못해 죄송하고 기다려주신 유저들에게 감사한다. 더욱 노력해서 이번에는 실망스러운 모습 보이지 않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중국산 게임의 틈바구니에서 조그맣게 빛나기 시작하는 광채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1만원을 받았다면 그 만큼의 즐거움 줘야하는 게 장사의 도리다" 그의 말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김동욱 기자 (kim4g@mona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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